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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1. 개요[편집]


구한말의 관료이자 외교관.

조선 후기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교육인으로 친청친미친러를 거쳐 친일파가 된 기회주의적 민족반역자이다.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기유각서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국적에 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후대에도 친일파의 대표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 [14]

2. 생애[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완용/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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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67세
노년의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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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영친왕과 대한제국 내각의 모습

3. 성품[편집]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 [15]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16]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 [17]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자라면 눈 감고도 한시 몇편 줄줄 쓸 만큼 통달했을 사대부 입장에선 어지간한 단어는 다 한자어인지라 문법 몇 개만 익히면 되는 일본어는 전혀 배우지 않고 완전 이질적인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 [18]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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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의 친필.

행적과 성격과는 관련 없이 서예에 능해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필체에 대해 예술의 전당 학예연구사인 이동국 씨는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다"고 밝힌 바 있으며, 그 동안 공개된 이완용의 필적을 보면 그는 행서를 즐겨 쓴 편이다. 행서는 정자체인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 서체로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우수한 글씨체라 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의하면 경북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및 천왕문 [19]창덕궁 함원전 등에 걸린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했다. 또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필체는 이완용이 아니라 동농 김가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삶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글씨의 수준과는 별개로 가격은 바닥을 긴다. 물론 그가 원체 명필이었던 까닭에 아예 휴지값까진 아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수집가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 2~30만원, 비싼건 40만원 선에 거래된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면 최소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은 했을 글씨라는 말도 된다. 서예는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인품·평판도 값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글씨가 쓴 사람의 성품과 평판이 반영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완용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경우,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씨들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으며(대한민국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 일단 경매에 나왔다 하면 대한민국 원화 기준 억 단위는 가볍게 찍는다 [20]안중근의 글씨가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안중근의 올곧고 청아한 성품과 민족에 대한 충성심 [21]이 글씨에 그대로 묻어났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와 적대적 포지션에 있는 일본 순사들이나 간수들도 글씨 한 점 얻어가려고 했는데, 이는 안중근 의사의 행적과 태도, 지식이 주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가진 특유의 기개와 고귀함은 이상적인 남성,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이라면 막연히 동경하고 추구하는 무인의 성품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사무라이를 비롯한 에도 시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당시 일본인 입장에서는 완벽한 무인, 사나이로 보였던 셈이다. 당대 재판을 맡은 검사, 변호사, 간수가 모두 그를 존경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판사도 안중근의 미완성 유고작인 동양평화론 집필을 마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하려 했지만 본국에서 직접 집행 통보가 내려오면서 연기하지 못했다 [22]김구의 글씨도 수천만 원이고, 비교적 덜 유명한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 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반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글씨는 고작 30~40만 원이며, 말그대로 똥값이다.

4. 평가[편집]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가 사망한 지 95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고 있다. [23]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후술하겠지만, 이완용은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24] 하지만 그 똑똑한 머리로 매국노 짓을 했으니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백날천날 뛰어나 봤자 기본적인 인간 됨됨이가 글러먹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나치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가 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다.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 [25]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욕을 먹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5. 여담[편집]

  • 광무개혁 시행 당시 파직되어 고향에서 은거하던 상황이었다.
  • 본인의 평판이 워낙 나빴던 탓에 그의 아들 이승구 [26]가 26세로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을 해서 아들이 자살한 것이라는 조롱성 루머가 돌았다.??? 이 내용은 매천야록에도 기재되어 있어서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조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해당 기사.
  •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 같은 진짜배기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정약용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아래는 그 명단과 당파 및 기타 설명.
    -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대북)
    -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를 모독한 노론)
    -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계유정난에 반대한 장군)
    -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 감역(監役) 허욱(許煜)
    -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 승지 정해(鄭楷)
    -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준론)
    -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 이조 참의 윤연(尹㝚)
    -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 지평(持平) 윤지(尹志, 나주 괘서사건의 주모자로 소론)
    -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소론 준론)
    -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 대사헌 심악(沈䥃)
    -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 지평 이동양(李東讓)
    -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 승지 이중술(李重述)
    -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 승지 이보욱(李普昱)
    - 승지 김호(金浩)
    - 현감 박필현(朴弼顯, 소론 준론)
    -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 감역(監役) 정권(鄭權)
    -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노론)
    -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 승지 이재화(李在華)
    - 정언 이우화(李宇和)
    - 주서(注書) 권숭(權崇)
    -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 감사 정사효(鄭思孝,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 정언 권집(權䌖)
    -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 승지 박홍도(朴弘道)
  •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 [27]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참고로, 같은 을사오적인 박제순도 있다. 덕분에 성균관대는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라고 놀림받는다.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 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했다. 고종 때 와서는 어느 정도 실력만 되면 관례적으로 붙여 주는 직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실제 저 페이지에 들어가보면 고종 재위 기간인 15,886일 동안 대사성이 무려 344명이었다. 1인당 평균 46.18일(1달 반 정도) 재직한 셈.
  • 이완용과의 관계를 오해받은 사람들로는 같은 집안인 것뿐인 역사학자 이병도는 물론이고, 이완용의 고향이 아닌데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전라도 [28]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에 관한 루머 [29] 등이 있다.
    • 이병도는 이완용과 촌수로 따지면 무려 30촌이나 된다. 이 정도면 그냥 남이다. [30] '병'자 돌림도 '용'자 돌림과 두 항렬 차이가 나니 조카는 절대 될 수 없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이병도 개인의 행보는 동정의 여지가 없다. 일단 자신의 친일 행적도 그렇고, 이완용과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 했던 짓, [31] 이완용을 모 인터뷰에서 익산의 아들(?)로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학자라 할 수 없는 저열한 짓이었다.
    • 루머의 마지막 피해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다.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철이란 사람과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별개의 인물로, 본관도 다르고, 한자 이름 [32]이 아예 다르다. 이완용 손자 이병철은 작위를 세습한 이항구의 아들이며, 이병철 명예회장은 경주 이씨 판전공파에 진주 향반 출신인 이찬우의 아들인데, 이완용과 어떻게 엮어보려고 이찬우를 이완용의 늦둥이 아들 정도로 끼워맞추려는 사람까지 보인다.
  • 의외로 졸렬한 행보와는 달리,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짱 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 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 곳에 2번 떨어지는 건 더 드문 일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의 한계인지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매우 위험한 말인데, 벼락이 이미 떨어진 곳의 공기는 플라즈마화돼서 전도성이 더 좋기 때문이다.
  • 이덕일은 "이완용이 노론 최후의 수장으로, 노론 세력을 대표해서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노론이었으면 위의 인물들을 사면복권시켜 줄 리 없다. 사실 조선 말기부터 외척의 세도 정치가 활성화되면서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서인/동인/남인/북인/대북/소북/노론/소론/벽파/시파 따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아예 외세에 놀아나게 된 근대화 시기였으니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 어렸을 당시에 총명했고 똑똑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애초에 민족을 팔아넘길 정도면 똑똑함을 넘어선 머리인 것이다. 물론 그런 자신의 능력을 민족을 위해 사용했다면 모를까, 민족을 팔아넘기는 짓에 사용했다는 것이니 능력의 출중함을 따지는 것은 아무 소용 없다. 그야말로 곡학아세의 훌륭한 표본이다.
  • 이제는 자기 나라조차도 아닌 중국에서도 매국노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중화민국 북경 정부 시절인 1921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몰락시키며 중국의 패권을 잡은 봉천군벌과 직예군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때 봉천군벌의 수장이던 장쭤린은 진윈펑 내각의 사퇴 이후 자신과 친한 교통계의 수장인 량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게 당시 말 많던 산동반도의 소유권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중국 사람들이 내부에서 반발이 심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적이던 돤치루이의 안휘파 인물을 대량으로 사면하기까지 하자 직예군벌의 수장이던 우페이푸는 이를 비난하면서 전보를 보내곤 과거 중국의 여러 매국노와 더불어 이완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량스이를 욕한다. [33]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량스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량스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했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장방창 [34]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만주군벌 장작림' 中
    이렇게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면 당대 중국인들이나 식자층도 '이완용 =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인식했고 그 이름도 유명했다는 이야기. [35]
  • 충격적이게도 이완용이 배향공신이 되어 최소 5년 간 종묘에 모셔지는 대참사가 실제로 일어났다. 그가 사망한 직후인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 [36]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 한창수 [37]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 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고 [38],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했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 [39],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했다. 물론 1945년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출향되었다. 김병시, 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 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그냥 이(李)씨 가문(家)의 완용(完用)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그대로 읽으면 '이가 완용'
  • 여러가지 의미로 유명하다보니 동명이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이완용이란 이름은 배신과 매국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매국노들은 몰라도 이완용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매국노?'라고 할 정도로 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진 사람.
    • 동명이인은 물론 이름이 똑같거나 연상이 될 정도로 비슷한 이름이라서 주변으로부터 피해를 당해 개명신청을 한다면 범죄자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거의 100% 허가해 준다고 봐도 되는데, 개명 허가받기 힘들던 2000년도 이전에도 웬만해선 허가해 줄 정도였다.
  • 같은 시대에 살던 왕실 종친 중 동명이인이 있었는데 하필 이 사람도 조선귀족 자작 위를 받은 친일파이다.(...)
  • 이름이 이완용이란 이유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다. # 물론 일부 방송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름 때문에 하도 놀림을 받아 이미 해탈했는지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듯 하다.(링크의 마지막 이미지)
    • 심지어 두시탈출 컬투쇼 사연 중에는 친구 이름이 이완용, 무려 한자까지 똑같아 어릴 때부터 고통을 받았고, 옆 반 친구 이름이 하필 이순신이라 둘이 싸우면 선생님이 항상 이순신 편을 들었던 사연도 유명한 일화.
    •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는데, 그 이완용 후보는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다른 이완용 후보가 출마했는데, 이 사람도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 매국노의 동명이인이 박한 취급을 받는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은 종전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까이기도 한다.
      • 중국의 경우 진회가 여기에 해당.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를 넣지 않는다.
      • 독일의 경우도 아돌프라는 이름이 과거에는 흔했으나,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쓰이지 않으며 이미 아돌프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사람들도 절대다수가 개명을 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막장 부모가 첫째 자녀의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로 지었다가 아동 학대로 간주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4명의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을 박탈 당했던 사례가 있다.
  • 2011년 5월 20일 이완용에 대한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출판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을 위해 용기를 내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황제와 황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이로 인해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이완용을 옹호하고 재평가한 매국행위 변론 서적이라는 낭설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윤희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의 이성을 비판 없이 충실히 따라갔을 때 얼마나 가증스런 역적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바로 이완용과 근대에 대한 진짜 비판을 가하려고 한 것."이라고는 하는데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듯 하다.
  • 2013년 1월 중순경 위키피디아 한국어 버전 이완용 문서에 이완용을 매국노로 평가한 부분을 삭제하고 조선을 근대화시킨 위인이라는 류의 내용을 추가하며 미화하려는 지속적인 반달이 행해졌다. (정보없음 부분) 이후로도 잊혀질 때마다 특정인들에 의해 문서가 훼손되고 있으며, 이는 본 문서도 마찬가지라 편집에 1단계 제한이 적용되었다.
  • 전라북도 부안군에는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 일단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세워진 거다. 대략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이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는데, 이후 이완용이 매국노가 됨으로서 이러한 공덕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역시나 광복 후 이 공덕비는 수차례 수난을 당했으며, 본래 서 있던 자리가 아닌 줄포면사무소 뒤편에 반파된 채로 보관되고 있다고.
  • 의외로 관료로서의 이완용과 지식인으로서의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고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40] 실제로 이완용의 업무 스타일은 해당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대한제국에 대한 애국심만 투철했더라면 꺼져가는 조선의 명운을 되살릴 만한 유능한 인재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사실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증오받고 욕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을사늑약이다. 그 이전에 죽었거나 중립적인 침묵만 지키고 국권피탈에 협력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역적으로 낙인찍힐 일은 없었다. [41] 오히려 그럭저럭한 일생을 보냈고 을사조약 참여를 거부하거나 자결로 항거하였다면 을사의인이라 존경받고 훌륭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사이에서까지도 아싸 신세였다고 한다. 물론 생전 일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나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았던 것 때문에 친일파 내에서도 부정적으로 볼 여지와 별개로, 이완용이 상당히 악질적이란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사항.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9번지는 2003년 건축된 이완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건물이다. 출처.실제 이완용의 자택이 옥인동에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해당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그 집터에는 옥인교회 · 아름다운재단 · 길담서원 등이 들어서 있다.
  • 심지어 죽을 때도 일제에 자신의 재산을 바쳤다. 다른 사안에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으나, 재산 문제에만 분명한 유언을 남겨서,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사회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이 전달 되었다고. [43]
  • 아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가 되거라" 라고 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알고 보니 엔하위키 시기에 벌어진 문서 훼손이 최초 출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확히는 4순위 근거를 반영하는 주장과 관련된 토론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로그 중 가장 오래된 시기인 2011년 7월 이전에는 해당 어록이 아예 발견되지 않은 게 확인되면서 발굴되었고, 그 전 엔 퍼진 게 없던 것이 발견된 것. [44] 그 사이에 상당히 퍼진것이 확인되고, 문헌 오염 당한 내용 자체가 화제가 된 경우였던 데다, 제도권 언론사 MBC 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을 정도. [45] 다만, 해당 문서 훼손은 엔하위키 로그 중, 로그가 누락 된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 나무위키에 크롤링 될 때 넘어온 것 이라서, 문서 훼손의 정확한 주체를 파악 할 수는 없으나, 문헌오염 자체는 친미를 비난할 목적으로 인용되거나 [46]일뽕들이 이완용을 재평가하자고 주장할 목적으로 인용하는 등, 문헌 오염 자체는 성향에 관계 없이(…) 발생하였다.

Yamagata Aritomo
  • 이 사진이 이완용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이 사진의 인물은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이완용의 사진이 아니다.
  • 이재명 의사가 죽일 뻔 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남고 한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이재명 의사가 21살이어서 총을 빼앗았으나 결국 칼로 시도하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이재명 의사가 체포되고 나서 김구가 엄청 후회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암살하려 한 곳은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오늘날 명동성당)인데, 이완용은 여기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 동 시대에 같은 이름의 친일파가 있었다. 종실 이완용으로,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의 현손이자 봉사손이다. 다만 이름 끝 글자의 한자가 다르다. 이 문서의 이완용은 ‘李完’으로 쓰지만 동명이인 이완용은 ‘李完’으로 쓴다.

5.1. 재산과 호의호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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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인동의 이완용 자택(1909년) 출처
이완용 사망 당시의 자택 모습 출처 [47]

검약한 습관이 있었다지만, 그런 습관과는 별개로 자신과 자신 일가의 치부에 상당히 열심이었다. [48] 이런 이완용만큼이나 친일 행위로 많은 재산을 치부한 사람들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휘와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 뿐이였다. 민영휘는 원래 친청파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됐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은 윤덕영이였고 이완용이 2번째였다.

참고로 가장 많은 재산의 소유자였던 윤덕영(尹德榮, 1873년 12월 27일 ~ 1940년 10월 18일)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계비로 대한제국의 2대 황후이자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였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윤덕영의 동생. 순정효황후는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던 한일합병조약에 온몸을 던져 항의하며 옥새를 치마 속에 숨겨 울면서 도망쳤는데 이걸 빼앗은 장본인이 바로 그녀의 큰아버지 윤덕영이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 원 가량 된다고 한다. 이완용은 해방 직전에 땅들을 다 팔아서 현금화했다고 한다. 당시 이완용이 소유한 땅은 여의도의 8배 면적이었다. 이완용보다 더한 부자였던 윤덕영의 땅은 "19,467평", 즉 축구장 8개의 면적이였으며 옥인동의 약 "54%"나 되는 대부지였다. [49] 그걸로도 모자라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 99칸이 있는 총 "2만평"의 대저택이 윤덕영의 소유였다고 한다.
세상 사람이 아방궁이라 부르는  
세상 사람들이 아방궁보다도
아방궁을 짓는 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까닭을 더 이상하게 생각한다.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동아일보 1921년 6월 23일 기사내용)
당시 신문인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기사에서 화려함에 감춰진채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눈물로 만들어진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벽수산장도 윤덕영의 저택이였다. 윤덕영 역시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영원히 사라지지않는 상처를 남긴 최악의 친일파였고 그가 나라를 팔아먹어가며 지은 벽수산장은 겨우 100년도 못 버티고 사라졌다.  [50] 하지만 이런 윤덕영과 이완용보다 더 많은 재산의 소유자가 있었으니 바로 위에서도 언급한 민영휘. [51]

이완용이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는데, 이는 또한 병탄 전의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도 이처럼 막대한 재산 때문이리라. 물론 몇몇 개념있는 일부 후손들은 자신의 성을 바꿔가면서까지 이런 땅 찾는 행태에 반대하기도 했다.

게다가 호의호식하던 이완용 일가는 당시에는 굉장한 사치품이던 자동차도 타고 다녔다. 그 시절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 왕실용 어차를 들여왔는데 [52] 고종과 순종과 왕실을 위한 어차로는 캐딜락과 다임러 [53]와 오버랜드 [54]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자신은 위슬리 [55]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 외에 이완용과 송병준을 포함한 고관대작들도 뷰익이나 포드나 쉐보레 등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수입차/국내 생산 차량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조선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요 고급품이었다. 기록 사진으로 당시 고관들이 탔던 고급 자동차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진 장면들도 있다.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이완용 생전인 1912년에 그의 아들 이항구가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은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며 큰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 [56]참고

사실 이완용은 재산이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미미하였고 [57]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당시 이완용은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의 7.7배 정도 면적의 땅을 보유했으며(참고), 집을 여러 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 이 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m2(3천 평 남짓)인데, 이는 그의 땅의 0.05% 정도다. 몰수원칙상 그가 받은 은사금과 이자를 고려한 금액만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1992년 소송을 걸어 되찾았고, 증손자 이윤형은 소송으로 되찾은 땅을 최대한 빨리 팔아버린 뒤 캐나다로 이민갔다. # 땅을 돌려줬다는 이유라는 게 민족정기보다 민사법이 더 앞선다는 논지였다. [58] 이윤형은 2002년에 캐나다에서 사망했다고 한다.